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희생자 수, 생존자 == 폴란드의 대표적인 광역권이던 크라쿠프, 르부프 인근의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 베우제츠로 이송되었다.[* 나머지 일부는 아몬 괴트가 소장으로 있던 프와쇼프 노동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벨라루스-러시아에서처럼 대규모 총살로 학살되었다.] 따라서 베우제츠는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에 이어 희생자 수가 세번째로 큰 절멸수용소로 알려져 있다. 전쟁 직후부터 2000년대까지 베우제츠에서의 희생자 수는 50만~60만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2000년 회플러 전보(Höfle Telegram)[* SS 돌격대지도자 헤르만 회플러가 1943년 1월 11일 베를린의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보낸 일급 기밀의 전보로 1942년 12월 31일까지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워진 절멸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수를 보고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이 입수한 독일의 자료들 중에서 2000년 기밀해체되어 공개되었다. 상당히 암호화 되어있어서 각 수용소들은 이니셜로만 표기되었다.(예를 들어, 트레블링카는 T, 베우제츠는 B) 한편 다른 수용소로 보내진 희생자 수를 보면, 12월 31일까지 마이다네크로는 24,733명, 소비보르로는 101,370명, 트레블링카로 713,555명이 보내져 1942년 일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총 127만 4166명이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로 보내졌다.]가 공개되면서 최소 수치는 더 낮아졌다. 회플러 전보에 의하면 1942년 12월 31일까지 베우제츠로 보내진 희생자 수는 434,508명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1942년 12월 11일에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들어왔다고 하니 이 숫자는 베우제츠의 희생자 수로 가장 낮게 언급되는 수치이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비 폴란드 유대인, 비유대인 숫자가 누락되어 있기에 보통 43만 4천명보다 좀 더 높은 수치를 인용한다. 현재 폴란드의 베우제츠 추모 박물관에서는 45만명을 인용하고 이스라엘 야드 바셈 박물관은 60만을 인용한다. 베우제츠에서는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에서와 달리 대규모 봉기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 국내군의 한 게시판에는 1942년 6월 13일 베우제츠에서 봉기가 일어나 SS 6명을 죽였다고 하나 다른 자료들에는 이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아 단순히 사기 진작차원에서 만들어낸 내용으로 보인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간헐적으로 탈출한 사람들 뿐이었다. 1942년 3월 여성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는 걸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두 명의 존더코만도가 탈출한 것을 시작으로 희생자들의 물품을 실은 화차에 숨어 탈출하거나 하수구에 숨었다가 탈출하는 등 약 50여명이 베우제츠에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추적당해 살해당하면서 전쟁 끝날 때까지 7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 중 폴란드 인민정부의 나치 전쟁범죄 수사 위원회에 자신들의 경험을 증언한 사람은 단 두명, 루돌프 레더와 하임 히르슈만이었다. 하지만 히르슈만은 전후 인민정부의 안보부서에서 일하다 반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되면서 베우제츠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은 레더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트레블링카에서는 67명의 존더코만도가 살아남아 그나마 증인이 많았지만 베우제츠의 경우엔 증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